1997년에 개봉한 애니메이션 영화 '모노노케 히메(もののけ姫, Princess Mononoke)'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千と千尋の神 し, Spirited Away)'과 더불어 지브리 스튜디오의 명작으로 손꼽는 작품입니다. 각본과 연출을 담당한 미야자키 하야오(宮﨑 駿, Miyazaki Hayao) 감독의 철학적 깊이와, 예술적인 감각이 모두 집약된 이 영화는 단순한 애니메이션 영화를 넘어서 인류와 자연, 생명과 죽음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았습니다. 작품이 개봉했던 1997년 당시에나 이 글을 쓰는 2025년이나 상관없이, 지금까지 지브리 스튜디오가 보여준 그 어떤 작품보다도 분위기나 성격이 굉장히 냉정하고 현실적입니다.
'모노노케 히메'는 일본 영화 역사상 놀랄만한 기록을 세웠는데, 1997년 7월 12일에 개봉해서 극장에서 1년 내내 상영함으로써, 당시 일본 극장가 역대 최장기간 상영작이 되었습니다. 그것도 애니메이션 작품이 말입니다. 덕분에 일본 내 1,420만 관객을 동원하는 등, 정말 상업적으로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평론적으로도 그냥 완벽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만큼 매우 훌륭합니다. 영화의 장대한 스토리나 영상미, 세계관, 캐릭터, 철학 등의 예술성은 물론이거니와 작화나 카메라 워크, 히사이시 조(久石 譲, Joe Hisaishi)가 담당한 음악이나 음향 등의 완성도까지 모두 극찬을 받았습니다. 당시 일본 아카데미상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을 비롯한 수많은 상을 휩쓸었고, 서양권에서도 크게 극찬을 받아 베를린 영화제에 초청되기도 하였습니다. 덕분에 미야자키 감독과 지브리 스튜디오가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애니메이션 영화 '모노노케 히메'가 개봉된 지 30년 가까이 된 지금에도 여전히 강렬한 인상을 남기게 되는 이유와, 시대를 초월한 명작으로 남을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영화가 다루는 보편적인 주제와 예술성, 복합적인 요소 등을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스포일러 경고: 이 글에는 영화의 주요 내용과 결말에 대한 언급이 포함될 수 있습니다. 스포일러를 원하지 않으신다면 감상 후 읽어주세요!
1.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 주제
1) 무로마치 시대의 배경
영화 '모노노케 히메'의 시공간적인 배경은 일본의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 Muromachi period, 1336~1573년) 입니다. 이야기의 시작은 일본의 서쪽 지역에서 총알을 맞고 죽어가며 재앙신이 되어버린 멧돼지 신 '나고(ナゴの守)'가 '에미시' 일족의 한 마을을 기습하는 장면부터 시작합니다. 마을에 살고 있던 주인공인 소년 '아시타카(アシタカ, Ashitaka)'가 '나고'를 사살하지만, 그 원한의 대가로 아시타카는 '나고'로부터 저주에 걸려버립니다. 그 저주는 아시타카의 뼈를 파고들어 결국 죽게 만드는 무서운 저주였습니다. 아시타카는 자신의 생명을 갉아먹는 저주를 막기 위해 자신이 기르는 붉은 영양인 '야쿠르'와 함께 먼 여행길을 떠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아시타카와 더불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인 '산(サン, San)'이라는 야생의 소녀를 만나, 무수히 많은 목숨을 건 복잡한 싸움들과 여러 과정을 거쳐 결국 '산(サン, San)'과 함께 저주를 풀어나가게 되는 내용입니다.
2) 보편적이고 장엄한 작품
제가 생각했을 때 이 영화가 지금 봐도 명작인 이유 중 하나는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인 주제를 다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영화에서 다루는 자연과 인간의 공존과 생명과 죽음의 순환, 문명과 원시의 갈등은, 시공간을 초월하고 동서고금을 막론한 인류의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질문이자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스튜디오 지브리의 여타 작품들과는 다르게 분위기가 굉장히 장엄하고 냉혹하고 또 날카롭게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지브리 특유의 어린이나 가족 등의 대중성을 타깃으로 하기 보다는, 확실히 보편적인 주제 의식과 깊이 있는 예술성의 표현에 집중한 작품입니다.
3) 지극히 현실적인 표현
영화의 주요 내용인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한 작품들을 연출하는 것은 미야자키 감독의 특징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 작품의 이전 작품인 '바람계곡의 나우시카(風かぜの谷たにのナウシカ, Nausica of the valley of the wind)라던지, '천공의 성 라퓨타(天てん空くうの城しろラピュタ, Castle in the Sky)' 등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묘사나 연출 등이 낭만적이고 동화적이었던 이전 작품들과 달리 이 작품에서는 전반적으로 냉혹하고 그로테스크하며, 굉장히 날 것의 현실적인 표현을 엿볼 수 있습니다. '모노노케 히메'와 비교해 보면 지금까지 그가 보여준 자연적인 요소가 들어간 다른 작품들은 마치 애들 장난 수준같이 보입니다.
4) 동서양을 아우르는 철학
특히 고대 일본의 신화와 자연숭배 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동서양을 아우르는 철학적인 깊이를 보여줍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숲의 신인 '시시가미(シシ神)'는 생명을 주고 죽음을 가져가는 존재로서 생명과 죽음이 순환하는 자연의 법칙을 상징하는 듯합니다. 이는 동양 불교의 교리 중 하나인 윤회사상이라든지, 또 서양의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비롯된 자연주의 등 동서양 양쪽에서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고, 또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라고 보입니다. 그래서 이 작품이 일본을 비롯한 동양은 물론, 서양에서도 그렇게 큰 찬사를 받았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듯 이 영화는 동서고금을 초월한 보편적인 주제를 깊이 있게 풀어내어 지브리 작품 중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더불어 여전히 큰 사랑과 관심을 받는 명작으로 남아 있습니다.
2. 시각적 예술성과 현실적이고 감동적인 서사
1) 제작의 방대한 수치와 규모
'모노노케 히메'는 제가 이전에 글로 소개하기도 했던 1992년에 개봉한 영화 '붉은 돼지(紅の豚, Porco Rosso)' 이후 당시 감독의 5년 만의 신작이었으며, 은퇴를 수없이 번복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은퇴작으로 여러 매체에서 거론되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이 얼마나 대작이냐면, 정말 감독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쏟아부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규모입니다. 그가 작품을 구상한 기간만 총 16년이 걸렸고, 제작한 기간은 3년이 넘었으며, 러닝타임만 133분에 달하는 이 작품에 무려 14만 장이 넘는 동화가 들어갔습니다. 그것도 거의 수작업으로 말입니다. 이는 작품이 개봉했던 1997년의 시대적인 상황이나 기술적인 수준 등을 고려할 때 정말 놀라운 수치와 규모라고 말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2)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한 작품
때문에 이 작품은 애니메이션의 예술적 가능성에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하고 이를 최대한으로 끌어올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거의 모든 장면을 수작업으로 그려내며 자연의 아름다움과 생명력을 생생하게 표현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특히 영화 초반부의 재앙신 '나고'의 촉수의 움직임을 표현하는 데 무려 19개월이나 걸렸을 정도입니다. 이렇듯 감독이 작품을 제작할 때, 정말 엄청나게 성의를 들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3) 야쿠시마 섬을 모티브로 한 자연 배경
또한 미야자키 감독은 깊이 있는 작품의 배경이나 표현 등을 구상하기 위해 여러 모티브가 될 만한 장소들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리고 방문하면서 '여긴 정말 숲의 정령들이 살고 있을 것 같다'라고 생각할 정도로 작품의 모티브가 되기 충분한 장소를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일본 가고시마현에 있는 '야쿠시마(屋久島)'라는 섬입니다. 야쿠시마 섬의 울창한 숲에는 '야쿠스기(屋久杉)'라는 수천 년 된 삼나무들이 많아 자연 그대로의 원시림을 간직하고 있었고, 오래전부터 신성한 장소로 여겨져서 일본의 고대 신화와 전설에도 자주 등장하는 곳입니다. 덕분에 섬의 상당 부분이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도 등재가 되어 있습니다. 미야자키 감독이 이곳을 직접 방문하고 여행하면서 깊은 감명을 느꼈고, 이 신비로운 분위기가 그대로 작품에 담겼습니다. 지금도 그 숲의 풍경을 보면 정말 영화 속에 나온 숲의 정령들이 야쿠시마 숲에서 살고 있을 것만 같습니다. 영화 속 숲속의 생명체와 신비로운 신령들의 모습은 현실감을 뛰어넘는 신비로움을 자아냅니다.
4) 웅장하고 장엄한 음악과 음향
시각적인 부분과 더불어 웅장하고 깊이 있는 음악이나 음향도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미야자키 감독이 작사하고 히사이시 조가 작곡하여 성악가로 활동했던 메라 요시카즈(米良美一)가 부른 OST '모노노케 히메(もののけ姫)' 역시 주인공인 아시타카가 '산(サン, San)'을 향한 마음은 절절하게 담아내어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음향 역시 영화에 맞게 장엄하고도 현실적인 효과와 인간의 심리 상태를 잘 구현하고 표현하여 삽입되었습니다.
5) 탄탄한 서사구조와 입체적인 캐릭터
서사 구조들 역시 굉장히 탄탄하며 캐릭터들이 종합적이고 입체적으로 그려져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합니다. 주인공인 아시타카는 저주에 걸리자, 생명과 죽음의 경계에 서게 되며, 또한 자연과 인간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로 묘사됩니다. '산(サン, San)'은 인간을 무척 증오하지만, 아시타카와의 만남을 통해 서서히 점진적으로 변화하며, 에보시(エボシ)는 강인하고 진보적인 지도자이지만 자연을 파괴하는 인물 등으로 양면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처럼 각 인물이 자신의 신념과 갈등 속에서 고뇌하고 성장하며 스토리에 깊이감을 더해갑니다. 감동적이면서도 복합적인 서사는 관객에게 깊은 여운을 남기며,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강렬한 인상을 전달합니다. 감독이 수많은 시간을 들여 치열하게 작품을 구상한 흔적이 보입니다.
3. '모노노케 히메'가 다루는 사회적인 함의와 복합적인 요소
1) 21세기에도 유효한 물음
영화는 환경 문제와 인간 문명의 갈등을 철학적으로 탐구하며, 현대 사회에도 유효한 메시지를 관객들에게 전달합니다. 작품 속 철강을 주로 제조하는 '타타라' 마을과 숲의 신령들 간의 갈등은 자연 파괴라든지, 개발이라는 현대 문명의 문제를 상징적으로 그려냅니다. 이러한 갈등 구도는 작품의 배경 시대인 무로마치 시대뿐만 아니라 21세기에도 지속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의 환경 문제와 개발 이슈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합니다. 작품에서는 자연 보호와 문명 발전 사이의 균형에 대해 질문을 던지며,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공감할 수 있는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2) 단순 이분법에서 탈피한 복합적인 구조
또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이 영화에서 단순히 선악의 이분법이 아닌, 각 인물의 입장을 통해 복합적인 갈등 구조를 풀어내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지브리 작품 중 전 세계적으로 가장 인지도가 높은 2001년에 개봉한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비교해 보겠습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모노노케 히메'와 비슷하게 일본의 전통적인 신화라든지 설화를 아름답게 풀어낸 작품이라는 점에서 일정 부분은 유사한 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선과 악의 구도가 매우 명확하게 드러나는 작품입니다. 또한 판타지적인 요소와 동화 같은 세계관이 중심이라는 점도 특징적입니다. 어쨌든 확실히 어린이와 가족 단위를 타겟으로 노린 작품임에는 분명해 보입니다.
3) 인간의 욕망과 생존의 딜레마
이 작품 역시 고대 일본의 신화적인 요소 역시 담겨 있기 때문에,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차이점은, 자연과 인간 문명의 갈등이라든지 생태계의 파괴, 그로 인한 욕망과 생존의 딜레마를 다루면서 절대적인 선악을 규정하지 않고 각자의 입장을 섬세하게 보여줍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이 영화는 확실히 성인들을 대상으로 한 작품인 것 같습니다. 삶을 살아봐야 삶의 복잡한 요소를 진정으로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4) 입체적이고 복합적인 캐릭터들
예를 들어 작중에서 악인으로 보일 수 있는 '에보시(エボシ)'는 자연을 파괴하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여성과 약자들에게는 자유와 자립의 기회를 제공하는 지도자로 묘사된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고대 일본의 사회나 문화를 생각해 보면 상당히 진보적인 인물입니다. 반면 아시타카와 함께 작품의 주인공인 '산(サン, San)'은 숲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인물이지만, 자연을 파괴하는 인간에 대한 강한 증오심에 똘똘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주인공이 선한 인물로 등장하는 요소가 많은 지브리 작품이라지만, 제가 보았을 때 그녀를 마냥 선인이라고 보기에는 솔직히 쉽지 않아 보입니다. 그 때문에 이런 입체적이고 지극히 현실적인 요소들과 캐릭터들의 설정들이 작품의 철학적인 깊이감을 더해주는 것 같습니다.
5) 지브리 작품 중 가장 깊이 있는 명작
요약하자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일본의 신화적인 요소를 바탕으로 동화적이고 판타지적인 세계에서의 성장과 모험 이야기입니다. 반면 '모노노케 히메'는 인간과 자연, 문명과 생태계의 갈등을 냉철하게 그린 철학적 서사시적인 작품입니다. 사실 이 두 작품은 추구하는 방향이나 타깃이 완전히 달라서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전 세계적인 인지도라든지, 영화의 대중성은 분명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앞서가겠지만, 영화의 주제나 철학적인 깊이,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 등은 '모노노케 히메'가 한 수 위라고 생각합니다.
결론
영화 '모노노케 히메'는 깊이 있는 메시지와 사회적 함의, 시각적인 미와 예술성, 감동적인 서사,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 주제까지 모든 요소가 조화를 이룬 작품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뛰어난 스토리텔링과 치열한 고민의 흔적과 섬세한 작화, 예술적 감각이 총결합되어 애니메이션의 경계를 넘어서는 깊은 감동과 여운을 관객에게 남깁니다.
특히, 영화의 배경이 되는 무로마치 시대나 21세기나 상관없이 모든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이 직면한 환경 문제와 문명의 갈등을 철학적으로 탐구하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메시지를 던집니다. 이 작품은 단순한 애니메이션이 아닌 예술 작품으로 평가받으며, 시간이 지나도 명작으로 남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깊이 있는 작품을, 그것도 2시간이 넘는 거대한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만들 수 있다는 저력에서 경외감과 동시에 부러움을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