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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브리 영화 '마루 밑 아리에티(借りぐらしのアリエッテ, The Secret World of Arrietty)' 여백의 미, 자연과의 조화, 감정의 절제와 은유

by 화이트팔콘 2025. 3. 1.

2010년에 개봉한 지브리 영화 '마루 밑 아리에티(借りぐらしのアリエッテ, The Secret World of Arrietty)'는 일본 미학의 정수를 담은 작품입니다. 이 작품을 연출하여 당시 지브리 스튜디오에서 최연소 감독으로 데뷔하기도 했던 요네바야시 히로마사(米林 宏昌) 감독의 섬세한 묘사와 감성적인 연출이 엿보였습니다.

 

영화의 원작은 비록 일본이 아닌 영국의 동화 작가 메리 노튼(Mary Norton)의 판타지 소설 시리즈인 'The Borrowers'를 바탕으로 한 것이지만 지브리 스튜디오의 연출과 감각이 결합하여, 일본 특유의 섬세한 미적 감각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특히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10cm 크기의 소인인 '아리에티'가 살아가는 작은 세계와 '쇼우'라는 평범하지만, 병약한 소년이 살아가는 인간 세계의 대비는 일본 미학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소(小)와 대(大)'의 관계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 같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지브리 영화 '마루 밑 아리에티(借りぐらしのアリエッテ, The Secret World of Arrietty)'의 여백의 미와 자연과의 조화, 감정의 절제와 은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스포일러 경고: 이 글에는 영화의 주요 내용과 결말에 대한 언급이 포함될 수 있습니다. 스포일러를 원하지 않으신다면 감상 후 읽어주세요!

 

1. '마루 밑 아리에티'에서 등장하는 여백의 미

 

1) 일본 미학의 기본이 되는 여백의 미

영화 '마루 밑 아리에티'는 먼저 여백의 미를 아름답게 표현하여 일본 미학의 전통을 계승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애니메이션 특유의 화려한 장면들이 이렇게 많이 나오는 데, 어떻게 여백의 미를 느낄 수 있냐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영화 속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휘감은 조용한 순간들과 고요한 배경은 관객들에게 사색과 여운을 제공하는 것 같습니다. 흔히 여백은 단순히 비어 있는 것이라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일본 미학에서 여백은 단순한 비어 있음이 아닌, 그 자체로 나름의 의미를 갖는 공간입니다.

 

2) 아리에티와 쇼우와의 대화

특히, 아리에티가 인간의 집 안을 조용히 탐험하거나 쇼우와의 대화 장면에서도 일본의 여백의 미가 강조되었습니다. 특히 지브리 특유의 웅장한 배경 음악을 상대적으로 최소화하고, 인물의 움직임과 자연의 소리만 남긴 채 화면을 비워둠으로써 상황에 깊이 몰입할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방식은 일본 전통 예술에서 자주 사용되는 기법 중, 일본의 정형화된 시(문화)인 하이쿠(俳句)에서 볼 수 있는 여운과도 일맥이 상통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3) 여운을 극대화한 연출 방식

또한 아리에티가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에서 볼 수 있는 긴 복도라든지 어두운 그림자들을 활용한 연출은 여백의 미를 시각적으로 극대화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처럼 빈 곳의 사용과 침묵의 미학은 일본 고유의 정서를 반영하며, 관객에게 감정의 여운과 깊은 사색을 남겼습니다. 이러한 여백의 미는 서양 영화에서 보기 어려운, 일본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연출 기법으로, 덕분에 일본 문화 특유의 미적 감각을 잘 반영하였습니다.

 

4) 시간의 흐름을 멈추게 한 연출 방식

영화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여백 미는 시간의 흐름을 느리게 만들어,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순간을 특별하게 만드는 효과를 주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아리에티가 아름다운 꽃잎 하나에 감탄하거나 물방울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장면은 마치 시공간이 멈춘 듯한 느낌을 줍니다. 이는 일본 전통 문학 시가인 와카(和歌)에서 자연의 순간을 포착하며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하는 방식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이러한 여백의 사용은 관객이 영화 속 세계에 더 깊이 빠져들게 만들며, 아리에티의 감정에 공감하게 해주었습니다.

 

거대한 꽃과 초록 잎 사이를 달리는 소녀, 마치 요정 세계에 들어온 듯한 환상적인 숲속 풍경 이미지

2. '마루 밑 아리에티'에서 등장하는 자연과의 조화

 

1) 정교하고 아름다운 자연묘사

일본 애니메이션 감독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宮崎 駿) 감독이 주축이 된 스튜디오 지브리의 작품들은 주로 자연과의 조화를 중요한 주제로 삼아왔고, 이 작품도 예외는 아닙니다. 이 작품은 비록 연출은 요네바야시 감독이 담당하였지만, 각본은 미야자키 감독이 구상하였기 때문입니다. 영화 속의 배경은 정교하고 아름다운 자연 묘사로 가득 차 있으며, 이는 일본 미학의 본질인 자연 존중 사상을 반영하는 듯 보입니다. 작은 풀 한 포기, 물방울의 움직임까지 세심하게 그려내며 일본과 자연의 섬세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2) 축소 지향 시점으로의 전환

특히 아리에티가 사용하는 물건들은 인간 세계에선 지극히 사소하지만, 몸길이가 10cm에 불과한 그녀에겐 거대한 도구로 변형됩니다. 이처럼 시점의 전환을 통해 자연과 인간, 그리고 작은 존재와 큰 존재가 조화를 이루는 모습에 있어서 일본적인 감성을 잘 볼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일본의 미니멀리즘적인 전통 정원 양식인 '가레산스이(枯山水)'에서 볼 수 있는 축소의 미학과 연결되는 것 같았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보통 정원은 빛, 흙, 물을 사용하여 자연을 표현합니다. 하지만 '가레산스이'는 물을 사용하지 않고 대신 바위나 모래, 이끼를 통해서 자연을 표현합니다. 물의 공간은 물이 아닌, 자갈을 깔고 홈을 그어서 물결을 표현합니다. 작은 정원의 공간을, 인공물을 통해 재해석했다는 점에서, 같은 동양권의 문화인 한국과도 차이가 나는 일본만의 축소 지향의 시점을 볼 수 있습니다.

 

3) 일본의 자연철학과 미학을 반영

일본의 전통적인 자연철학에서는 서양과 달리 자연을 정복의 대상이 아닌,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 바라보는 경향이 많습니다. 영화 속에서 아리에티 가족들이 인간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생활하는 모습은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이러한 자연과의 조화는 일본 신도(神道)의 세계관과 연결되며, 모든 존재가 서로 의존하며 살아간다는 일본 미학의 핵심 철학을 반영하는 듯합니다.

 

4) 자연의 소리를 활용한 연출

또한 이 영화에서는 자연의 소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영화 내에 감성적인 분위기를 자아내었습니다. 바람의 흐름소리라든지, 물방울의 떨어지는 소리,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 등은 배경음악처럼 자연스럽게 흐르며 아리에티의 세계에 깊은 생동감을 불어넣습니다. 이는 자연을 단순한 배경이 아닌, 이야기의 중요한 요소로 삼았던 일본 미학의 특징을 잘 드러내었다고 봅니다.

 

3. '마루 밑 아리에티'에서 표현되는 감정의 절제와 은유

 

1) 감정을 절제한 연출

이 작품에서는 보통의 신파극처럼 감정을 과도하게 표현하지 않고, 다소 절제된 연출로 관객의 공감을 끌어냈습니다. 일본 미학에서는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미묘한 변화를 통해 표현하는 것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도 일본만의 감정을 절제한 미묘하면서도 섬세한 연출이 나타났다고 생각합니다.

 

2) 함축적이고 은유적인 방식

예를 들어, 아리에티가 맨 처음 인간 소년 '쇼우'를 만났을 때의 긴장감과 설렘은 눈빛과 미세한 표정 변화로 관객들에게 깊게 전달되었습니다. 두 인물의 대화는 짧고 간결하였지만, 그사이의 침묵이나 눈빛 교환은 말보다 풍부한 감정을 표현하였습니다. 이는 일본 고유의 미학 개념인 '요조(余情)'와 연결되며, 직설적인 표현 대신 함축적이고 은유적인 방식으로 감정을 전달합니다. '요조(余情)'는 한국어로 완벽하게 대응하는 단어나 표현이 없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남겨진 정취'라든지, '잔여의 정서'로 해석할 수는 있겠습니다. 작품을 읽는 독자에게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감정을 남겨 깊은 여운을 전달하는 일본의 방식입니다. 이는 일본 문화 전반에서 중요한 감수성이며, 문학뿐만 아니라 예술, 영화, 디자인 등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3) 절제되면서도 담담한 음악과 음향

또한 잠시 언급했듯이 이 작품에서는 일반적인 지브리 영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음악 역시 절제된 듯한 연출이 되어 있습니다. 정말 필요할 때만 음악이나 음향이 삽입되어 장면의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켰습니다. 특히 메인 테마곡인 '세실 코르벨(Cecile Corbel)'의 'Arrietty's Song'은 서정적이면서도 슬픈 멜로디로 구성되어 있으며, 아리에티의 외로움과 성장을 담담하게 표현하였습니다. 이러한 감정의 절제는 일본 특유의 섬세한 감성을 반영하여, 관객들에게 깊은 여운을 남겼습니다.

 

결론

지브리 영화 '마루 밑 아리에티'는 일본 여백의 미와 자연과의 조화, 그리고 감정의 절제라는 일본 미학의 정수를 아름답게 구현한 작품입니다. 언뜻 보면 단순한 스튜디오 지브리의 수작으로 보이지만, 제게는 단순한 애니메이션을 넘어서서 일본 문화의 미적 감각과 철학을 느끼게 하였습니다. 또한 지브리 특유의 섬세한 묘사라든지 깊이 있는 감성 연출은 관객에게 잔잔한 감동을 선사하였습니다. 일본 미학에 대한 이해도에 따라 영화 속에서 표현된 아리에티의 세계가 더욱 생생하게 다가오게 되었습니다.